헌책방에 널부려져 있던 '글 읽기와 삶 읽기'라는 3권의 연작 책을 단지 제목에서 풍기는 무게감에 6,000원이라는 헐값을 치루고 사온지 근 몇 달이 지나서야 읽게 되었다. 대학생들이 꼭 읽어 보아야 할 이런 교양책을 내 나이에 읽는다는 것이 어색했지만 이 책을 읽고 헛되이 보낸 나의 학창시절을 다시 되돌아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인간의 생존근거 중 하나인 ‘자아성찰’없이 책읽기를 하는 예비 지식인(대학생)들의 모습을 강의실안 ‘문화이론’이라는 실험적 강좌를 통해 보여 주는, 글쓰기 방법론이나 문학 평론서가 아닌 문화비평서이다.
저자가 보는 오늘날의 (예비)지식인은 ‘명제적 지식에 중독’되어 있는, 그래서 추상화 수준이 높으면 뭔가 어려운 것을 배웠다는 뿌듯함으로 흥미를 갖고 쉽게 이해하지만 일상적인 삶을 비추어주는 개념을 다루는, 즉 숫자나 추상적 수준에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나’자신의 문제로 풀려져야 하는 과제에 대해서는 어려워한다.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이유에 대하여 저자는 '식민지'라는 다소 진부한 용어를 꺼내들지만 이는 '정치적 속박'과는 관계가 없고 또한 우리의 현실과 주변 상황들을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분화로 규정짓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회, 자신의 사회를 보는 이론을 자생적으로 만들어 가지 못하는 사회’를 ‘식민지적’이라 부르고자 한다. 여기서 '식민지성'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된 현상을 뜻하기보다는 지식과 삶이 겉도는 현상을 뜻한다. (p22)
'식민지성'은 선진국들의 강압에 밀려 급한 변동 과정을 거치고, 서구라는 절대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자아성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우리나라를 비롯한 제3세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러한 사회속의 지식인들은 이론과 실천이 유리되어 서구와 같이 지식인들이 만들어 내는 이론이 현실을 보다 잘 보게 해야 하는 그런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삶을 어떻게 읽어내는지를, 즉 삶과 지식이 어떻게 겉도는지를 강의실 속 ‘예비지식인’들을 대상으로 ‘책읽기’라는 방법을 통해 파악을 하고 '보편적 이론에 대한 집착', '외부의 권위에 기댐', '일상성으로부터 유리된 지식 생산' 등을 식민지 지식인 담론의 특성이라고 결론짓는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 뿌리를 우리나라 교육제도와 근대적 지식 생산과정에 나타난 '지식인'들에서 찾는다.
총 3권에 걸친 저자의 긴 이야기 중 '글 읽기와 삶 읽기 1권'은 그러한 우리의 문제 중 하나인 우리나라 입시 교육제도하에서 양산된, 그리고 아직도 식민지 지식인의 대열에 줄을 설려는 준비하고 있는 지금 바로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교과서 이외 다른 책읽기가 불가능한 교육체계에 길들여진 교과서적 책읽기, 새로운 책읽기에 대한 저항, 자신의 삶을 회피하고 '공부거리'로 책을 읽는 버릇 등이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그럼, 결론적으로 지식인 사회에서 어떻게 책을 읽어 내야 하는가?
지식인 사회에서 책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질문은 곧 삶을 어떻게 읽는가 하는 질문과 통한다는 전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내가 존경하는 어는 노교수는 강의시간때 노트 필기를 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 강의하는 사람의 머리 속을 꿰뚫어 보라고 강조한다. 또한 책을 읽고 나면 그것에 더이상 메이지 말고 잊어버릴 것을 수시로 강조한다. 불에 태우라는 식으로까지 표현함으로 실감이 나게 한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교주가 되라, 신도가 되지 말라."는 말도 한다. 우리는 대학 출신 모두가 교주가 된 세상을 상상하며 끔찍해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독자적으로 사고하라는 그분의 말은 이 시대 지식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가장 의미있는 메시지가 아닐까? 바람직한 책 읽기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읽고 싶은 책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 대학생 중에는 그런 욕구조차 잃어버린 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우리를 걱정스럽게 한다. (p182)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책을 읽고, 책이 출현한 구체적 역사성 속에서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리고 독자적인 사고로 창조적 글쓰기로 이어지는 것이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읽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