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문명을 발굴한 슐리만, 이집트 문자를 해독한 샹폴리옹 그리고 투타카멘을 발굴한 하워드 카터 등 수천 년 전의 신비를 벗겨내기 위해 일생을 바친 위대한 고고학자들의 생애와 당시의 발굴 현장을 생생하게 묘사한 흥미진진한 책.
제목처럼(원제는 '신, 무덤 그리고 학자들') 쉬엄쉬엄 마음의 여유를 갖고 느긋하게 들추어 보는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저자는 역사의 발굴이라는 그리 순탄치만은 않은 고행의 길을 하나하나 따라가며 고고학자들의 그 때 그 감정을 격동있고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투타카멘의 황금초상보다 더 강렬하게 자신을 끌었던 한 묶음의 화환을 묘사한 하워드 카터의 회고를 읽는 순간 나 또한 그 곁에 서서 그와 같은 감동을 느끼며 화환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었다.
그러나 우리의 순수한 마음을 가장 깊게 감동시킨 것은 초상의 이마 주위에 놓여진 한 묶음의 화환이었다. 그것은 청상과부가 된 나이 어린 왕비가 남편에게 바치는 마지막 작별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제왕의 온갖 화려함과 위풍당당함은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색깔을 부지하고 있는 이 빈약한 한 묶음의 시든 화환의 아름다움 앞에 빛을 잃는 것 같았다. 그 화환은 3000년의 세월이 진실로 얼마나 짧은 순간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 그렇다, 어제와 오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실로 아련한 자태가 고대와 우리의 현대문명을 하나로 묶어 주고 있는 것이다. (p230)
돈과 영예를 떠나 황금보다 꽃 한다발에 더 큰 의미를 줄 수 있는 고고학자들의 이야기... '그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낭만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피라미드의 의미는 이집트의 신앙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피라미드를 세우려는 충동은 육체가 죽은 후에도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이집트의 근본적인 신앙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현세의 땅이나 하늘과는 별도의 장소에 내세인 미래가 있다. 이 내세에는 신의 심판을 통과하여 영의 세계에 살도록 허락 받은 죽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 적부심사인데 그들은 이때 그들 종교의 신경(secrete formules)을 알고 있어야 하며, 이승의 삶에 부족함이 없는 모든 것들을 지니고 있어야만 했다. 사후를 위해 지녀야 할 세간살이(paraphenalis)는 사람이 생존시 사용했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실질적으로 사는 집, 먹을 것과 마실 것 뿐만 아니라 하인과 노예와 관리들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유로이 다니던 영혼이 - 이집트 말로는 ‘바’ - 예전에 속해 있던 곳, 즉 육체 자체로 다시 찾아갈 수 있도록 시신이 영원히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어야 했다. 또 육체는 자신의 수호령(protective spirit), 즉 우리들 인격체의 타고난 생명력인 카(Ka)에게 집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도 온전하게 보존되어져야 했다. 왜냐하면 이 ‘카’는 어원이 ‘바’처럼 불멸의 것으로서 죽은 자들이 내세에서 9미터나 자란 밀들을(물론 다른 농작물도 마찬가지지만) 베고 거두어 들이는 데 필요한 힘을 제공해주는 것이었다.이러한 사후의 세계에 대한 개념은 두 가지의 결과를 가져왔는데 미이라를 만드는 것과 요새같은 피라미드를 세우는 것이었다. (p162)
거대한 규모의 피라미드를 세우는 것을 중단한 형이하학적인 이유는 무덤도둑들이 점점 대담해진 때문이다. 사실상 어떤 마을들에서는 수세기 동안 걸쳐서 무덤도굴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영원히 배고픈 다수가 영원히 잘 먹고 잘 사는 소수에게 반발하여 일어난 현상이었다. 피라미드에 의해서는 죽은 사람의 안전이 더 이상 보장되지 않게 되자 새롭고 더 복잡한 보호방법이 필요해졌고 결과적으로 무덤을 다른 양식으로 짓는 도리밖에 없었다.그러나 피라미드의 건립이 쇠퇴하게 된데는 더 어쩔 수 없는 비물질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역사 형태학적인 접근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형태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문화는 발생과 멸망에 있어서 유사점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한 번 문화적인 감각이 일깨워지면 하늘을 찌를듯한 기념물들을 세우는 경향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바빌로니아의 탑 모양의 신전과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교회와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서로 다른 점이 많지만 이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 건축물들은 마구 넘치는 야만적인 힘으로 거대한 건축물들을 지어냈던 문화의 초기단계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어두운 밑바닥으로부터 솟구쳐 오르는 장애를 모르는 힘은 건축 계산법에 필요한 정역학을 꽃피우고, 불굴의 의지로 자연으로부터 기계공학을 배워내서는 문화로 하여금 그 분출구를 찾게 해주는 것이다.
기술혁신 시대인 19세기에는 이러한 일이 예전에 가능했다고 믿지 않았다. 서양의 기술자는 그러한 거대한 건축물들이 도르래와 권양기와 기중기 같은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세워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념비를 세우려는 충동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주었다. 그래서 초기문화의 양적인 힘은 궁극적으로 후대 문명의 질적인 힘에 못지않은 업적을 이루었던 것이다. (p165)
미이라를 뜻하는 ‘mummy’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이것은 12세기의 아라비아의 여행가인 압드 엘-라티프가 mummies가 약용으로 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을 조사한 데에도 나타나 있다. mumiya 또는 mumiycai는 압드 엘-라티프에 의하면 역청 또는 ’유태인의 송진‘을 뜻하는 아라비아의 단어이다. 이 송진은 페르시아의 데랍게르드에 있는 머미산에서 바위로부터 스며나오는 것이다. 압드 엘-라티프가 mummy를 언급했을 때는 송진과 물약을 합한 것을 뜻했다. 16,7세기까지도 - 사실은 100년 전까지도 - 골절과 상처에 치료약으로 쓰이는 물질인 ’mummy’라는 약의 매매가 활발했었다. ‘mummy’는 또한 살아있는 사람으로부터 잘라낸 머리와 손톱도 뜻했다. 이것들은 마법에서는 몸 전체를 상징하는 뜻에서 귀신을 쫓아내거나 마법을 거는데 쓰였다. 오늘날 ’mummy’란 말은 거의 언제나 방부처리된 시체, 특히 고대 이집트인들의 보존이 잘된 시체를 뜻한다. (p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