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생활을 하면서 '갑과 을'의 관계로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갑의 위치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수도 늘어나지만 아직까지는 내가 을의 위치에서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업무관계로 갑과 을의 관계에서 초면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한 일은 아닌데 그 상대가 갑인 경우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는다. 특히 말 주변도 없고 내성적인 사람인 경우는 갑이라는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로 사람을 만나는 업무를 그만두고 다른 부서로 이동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어느 갑을 만났다.
나이는 나보다 10년 연상이었고 몇 번 인사는 나누었지만 사석에서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저녁식사 겸 반주를 하는 자리를 마련했는데, '혈연, 지연 그리고 학연 어느 것 하나 연결이 되는 것이 없는 사람하고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로 나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의외로 분위기가 괜찮았다. 나이도 지긋하시고 지위도 있으신 분이 서빙을 하는 아가씨에게 우스개 소리를 건내고 웃고, 마치 그 자리를 준비한 사람처럼 분위기를 잡았다.
둘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2시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자리를 마칠 즈음 '부담없게 대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네 얼마나 신경쓰였겠나? 그럴 것 같아 내가 먼저 분위기 좀 살렸네"
아가씨하고 농담을 하는 것도 나를 안심시키기 위한 의도된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고 한 번 더 고맙다는 인사를 정중히 드렸다. '접대를 받는 것에 대해 산전수전 다 겪으신 분이라 이런 여유가 있겠구나' 생각도 들었지만, 돌이켜 보건데 갑으로서의 이런 여유는 흔치 않았다.
고수에게서 뭔가 한 수 배웠다는 느낌이 들었다.